발칸 반도 코소보 정탐기
아침에 눈을 떴다. 긴 수면 시간은 아니었지만 내 몸은 숙면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침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매일 아침 보던 익숙한 모습과 사뭇 달랐다. 아! 꿈이 아니었다. 여긴 킹 살렘 선교 훈련원이 아니고 코소보 프리슈티나 공항 근처의 호텔 방이었다. 지난 밤12시에 도착한 공항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코소보 사람들의 모습은 꿈이 아닌 내 두 눈으로 직접 본 실제였다.
코소보 정탐 여행…Come Mission의 적극적인 지원과 기도 속에 지난 1월 12일 가벼운 흥분과 큰 기대를 안고 이재환 선교사님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공항 출국장에 도착했다. 잠시 후 속성 Covid-19 PCR 검사 결과 메시지가 이재환 목사님과 내 전화기에 각각 들어왔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이재환 목사님은 음성, 나는 양성! 몇 초간 멍했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이내 이재환 선교사님은 코소보 프리슈티나행 오스트리아 항공 탑승장을 향해 떠나셨다. 나는 우버 택시 탑승장을 향해 아니 격리 장소 킹 살렘 훈련원을 향해 각각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4개월 반이 지난 5월 24일, 드디어 혼자 코소보 정탐 여행을 오게 되어 코소보의 수도 프리슈티나에서 첫 아침을 맞은 것이었다.
이성민 코소보 현지 선교사님께서 아침에 직접 호텔로 오셨다. 본인께서 사역하시는 Gjakova (쟈코바)로 나를 데려와 주셨다. 이후 선교사님은 코소보 체류 기간 내내 발칸의 장님인 나의 눈과 발이 되어 주셨고, 수시로 필요한 데이터를 제공해 주는 ‘실사판 Siri’가 되어 주셨다.
정탐 여행의 또 다른 길 안내자로 내가 머물렀던 숙소의 주인 할머니를 빼놓을 수 없다. 본래 다른 숙소에 예약이 되어 있다가 출발 직전 숙소 변경 통보를 받았는데, 이것 또한 하나님의 세심하신 배려였음을 그분을 만나고 알게 되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과 같은 Fatime란 이름을 가진 이 할머니는 40년간 교사로 봉직하고 은퇴하신 분인데, 전쟁 중 본인의 집 마당 바로 앞에서 산을 향해 포탄 공격이 이뤄지기도 했고 남편을 전쟁 중에 잃을 정도로 전쟁의 참화 한복판에서 큰 아픔을 이겨내며 생존하신 분이었다. 테레사 수녀 연관 사회 기관에서 코소보 전후 복구를 위해 섬기기도 하셨다.
명철한 지식인 할머니는 매일 아침 터키쉬 커피와 스낵이 준비된 1층 테라스로 나를 초대해 주셨다. 우리의 대화는 늘 코소보의 역사와 전쟁 당사국 세르비아와의 민감한 이슈들을 포함한 코소보의 오늘의 현안들에 대한 질문과 대답으로 풍성해졌다. 이곳에서 종교에 관한 대화는 낯선 사람들 간에는 일종의 암묵적 금기였다. Fatime와의 대화 후 길을 나서서 이성민 선교사님의 인도를 따라다니며 목격하고 질문하고 또다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던 코소보 정탐 여행은 마치 학교 교실에서 배운 지식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확인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그것이었다.
코소보가 위치한 발칸 반도의 오랜 역사와 코소보인들이 최근에 겪은 전쟁에 관한 공부를 나름 하긴 했지만 선교사님께 듣고 현지에서 보게 된 현지인들의 마음의 상처와 전쟁 후의 어려운 현실은 훨씬 아프고 깊게 느껴졌다.
터키와 유사한 세속적 이슬람 사회 코소보는 인구의 95.6%가 회교도인 것을 감안한다면 길거리에서 히잡을 쓴 여성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꽤 열린 사회인 것처럼 보였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세속 정부에 의해 운영되는 나라라고 하기에는 회교 공동체 사회의 경직성과 폐쇄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자신들에게 씻을 수 없는 학살의 고통을 가한 세르비아인들과 동일시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판별이 된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배제된다. 그래서 터키와 마찬가지로 선교를 위한 기회의 땅이지만 실제로 열매를 얻기가 매우 힘든 곳으로 알려져 있다.
회교권 자체 안에서도 다양한 공동체가 존재한다. 발칸을 500년 이상 지배했던 오스만 투르크의 영향으로 수니파가 대세이지만, 역시 오스만 투르크를 통해 들어온 신비주의 수피즘의 일파인 벡타쉬의 회당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교외 쪽으로 나갈수록 벡타쉬 회교도가 많고 성향도 강성을 띤다고 선교사님께서 설명해 주셨다.
코소보의 회교는 비교적 근본주의 색채가 약하다. 전형적인 세속적 이슬람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회교를 전수받았고, 오스만 투르크 침공 당시 그 이전의 세르비아 정교의 중심부로서 문화적 유산도 상당 부분 남아있었다. 오랫동안 회교로의 개종 강요에 대한 저항이 있었던 역사적 기록도 있고 결정적으로 1945년부터 1992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붕괴 전까지 이어져 온 유물론적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모든 종교적 색채가 매우 옅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9년 코소보 전쟁 이후 정세가 안정되면서 근본주의 이슬람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포교를 해서 지난 20년 간 코소보에서의 이슬람 운동은 꾸준하게 활발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모스크에 출석하는 교인이 적고 대부분이 노년층이었는데, 지난 20년 간 젊은 사람들의 모스크 예배 출석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코소보 현지 체류 기간은 10일 남짓했다. 자동차로 2시간 이내에 국토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갈 수 있는 아주 조그마한 나라였기 때문에 이성민 선교사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비교적 많은 곳, 구석구석을 직접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여행 초반 코소보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비롯하여 청년과 함께 하루 종일 대화하며 등산도 하고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이후의 여정과 나의 태도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 주었다.
코소보 안에서의 구체적인 선교지 결정은 앞으로 차차 할 일이겠지만 가능성 있는 후보지들을 위해 보고 기도하고 싶어 몇 군데를 가 보기도 했다. 선교 후보지를 방문하기 위해 가던 중 Peja (뻬야)라는 곳에 있는 한 현지인 교회 이야기를 들었다.
코소보 전쟁 중 이웃 나라 알바니아로 피신한 코소보 청년이 그곳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를 만났다. 그는 그 선교사에게 복음을 들었고 전쟁이 끝난 후 선교사와 함께 폐허가 된 뻬야로 돌아왔다. 선교사는 그의 집을 복구해 주고 그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했다. 그리고 예전에 세르비아 선교사가 세워놓았던 한 교회를 복구해서 함께 섬기다가 선교사는 본국으로 돌아갔다. 선교사가 돌아간 후에도 그는 교회와 신앙을 떠나지 않고 그 교회의 장로로 섬겼고 오늘까지 그의 섬김은 현지인 목사 이상으로 신실하고 활발하게 계속되고 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선교사 훈련 기간 내내 들었던 이재환 선교사님의 선교 전략이 퍼뜩 생각났다. “눈에 띄는 규모의 사역이나 대규모 전도 행사에 힘을 쏟기 보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한사람, ‘희망의 사람’을 찾는데 힘을 집중하라” 내 속에서는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곳을 꼭 가 봐야해!”
즉시로 선교사님께 나를 그 교회에 데려다 줄 것을 요청드렸고, 두어 차례의 전화 통화 끝에 교회 위치를 확인하고 차를 돌렸다. 주 중이라 교회 철문은 닫혀 있었고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교회 철문을 붙잡고 이 교회에서 오래 전 시작된 주님, 현지인 청년, 그리고 미국인 선교사의 아름다운 동역의 모습을 그려보며 간절히 기도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내 눈은 자제할 수 없는 감동으로 젖었다.
“주님, 제게도 이런 사람을 만나는 은혜를 허락해 주소서!” 다시 돌아온다면 그 현지인 장로님을 꼭 찾아뵈리라 다짐하며 차를 돌렸다.
나는 이 한 가지를 확신한다. 하나님은 선교지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선교사를 보내시지만, 그 하나님의 마음 속에 선교사는 결코 당신의 비즈니스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소모품이 아니다. 하나님은 선교지의 사람들만큼 그들을 위해 보내시는 선교사들을 위한 사랑을 쉬지 않으신다. 그래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향해 계속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안달이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우리의 성장은 이것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고 그의 죽으심을 따라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한 고백은 실제 육체적 죽음까지 각오한 비장한 것임에 틀림없으나, 크리스천 여정 가운데 나의 모난 옛사람이 죽었음을 계속 선포하고 그 선포를 살아내며 성장하는 것 또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선교지를 방문할 때마다 주께서는 또 다시 죽어야 할 나의 거짓 자아를 드러내신다. 내가 속해 있던 문화권과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왜곡된 생각들은 나를 빈곤한 선교지의 사람들보다 우월한 자로 보게 했다. 심지어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나의 가치관은 모슬렘들을 나보다 약간은 더 야만적인 사람들로 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선교 여행 중 하나님은 나의 이 거짓 자아를 거푸 죽이셨다. 이 반복되는 죽음의 연습을 통해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선언은 나의 삶이 되고 이과정을 통해서 주께서 계속해서 내 눈의 꺼풀을 벗기고 계신다. 코소보 정탐여행을 통해 이제 조금 더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코소보의 선교 활동은 코소보 독립 당시에 비해 무척 위축되어 있는 상태이고 많은 선교사들은 이미 철수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철수할 계획이 전혀 없으시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부디 하나님께서 코소보 선교의 불을 계속 지펴 주시고 그 땅의 선교사들에게 신선한 비전과 용기를 공급해 주시며 20년 안에 그 땅에 대추수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기를 함께 기도하기를 요청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