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말씀의 실천, 거룩한 행동, 영향력 있는 능력의 삶에 있다.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어 어린이 그림 성경 배포
Come Mission 시니어 선교사인 한현호 장로님 내외 분과 함께 9월 13일부터 21일까지 폴란드를 다녀왔다. 올해 초, 컴미션은 포틀랜드에 에덴장로교회 원정훈 목사님 팀과 협력하여 우크라이나 어린이 그림 성경 출판을 하게 되었다. 이에 그 성경을 발간하여 배포하는 일로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살고 있는 폴란드를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그곳에서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돕고 있는 한국 선교사님들과 만나 우리가 출간한 <어린이 그림 성경>을 나누어 주며 복음 전도에효과적으로 쓰임 받기를 기도했다. 선교사님들은 이 책의 출판을 매우 기뻐했고, 적절한 사용 방법들도 서로 나누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이 어린이 그림 성경이 벌써 여러 나라말로 번역이 되어 온 세상에 나누어지고 있다고 한다. 내년에는 최초로 이 성경이 출판된 베트남에서 이 책의 효과적인사용을 위한 컨퍼런스가 열릴 계획이라고 한다.
동부 유럽의 카톨릭과 정교회의 참 모습에 대한 관심
폴란드 땅을 밟게 된 또 하나의 이유로는 카톨릭 국가인 이 나라의 복음의 상황을 살펴보자 함에 있었다. 코소보를 다녀온 후 동유럽을 바라보는 선교의 필요성을 실감하였기 때문이다. 유럽의 한 나라인 코소보에 무려 96%의 국민들이 무슬림들이라는 놀라운 사실과 함께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정교회와 카톨릭인데도 불구하고 이들이 기독교로 지칭되는 것에 또한 큰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해하기 힘든 정교회 국가 간의 전쟁
폴란드가 갑작스럽게 한국으로부터 많은 무기들을 수입하게 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던 터라 주위의 나라들의 신경이 매우 곤두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기독교의 범주에 들어있는 정교회 국가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심지어 핵폭탄을 사용할 것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도 정교회가 강한 나라인데 같은 정교회 국가가 형제의 나라를 이렇게 무참하게 짓밟을 수 있을까?
동유럽의 정교회와 카톨릭도 선교의 대상일까?
나에게는 발칸 반도를 선교적 전략지로 생각하고 있기에 동부 유럽의 기독교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동안 나는 이들을 미전도 종족의 범주에 넣지 않았기에 한 번도 이곳을 선교지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과연 카톨릭이나 정교회, 나아가서 콥틱과 성공회도 우리의 선교의 대상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기게 되었다. 특별히 정교회에 대해서는 이들이 우리의 선교의 대상이 될 것인지, 아니면 교제를 나누는 형제로서 복음의 동역자로 함께 일할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이미 복음을 들었다. 그러나 복음과는 멀리 떨어진 전통과 의식에 의전적이며 예전적이기에 이들이 우리의 형제라고 인정하기 힘들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 교회의 선교사로 가장 정통적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며 살아왔기에 이들을 복음적이라고 보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동부 유럽을 찾아가 정교회를 들여다보고 온 지금은 내 안에서 갈등이 오가고 있다.
정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
카톨릭이나 정교회는 여러 면에서 닮은 꼴이다. 정교회는 그 의미가 주듯 <진정한 교회>, <정통 교회>를 뜻한다. 이들 스스로는 기독교의 정통과 전통을 그대로 잘 보존해 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카톨릭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교황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교회는 독립적이며 민주적이며 정통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 물론 이들이 좋아하는 <Icon>이 우상이 아니며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도구라고 말하지만 이 <Icon>이 우상화된 사례는 많았다. 그래서 이것을 우상으로 여긴 사람들이 많은 <Icon>을 파괴하고 불사르는 집단적 행동을 했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이 <Icon>을 우상화하지 않고 있다. 교회당 안에는 책상과 의자가 없다. 서서 예배를 드린다. 그림에 보면 성소 안에 책상도 의자도 없다. 과거에 한국도 많은 교회에 책상과 의자가 없었다. 바닥에 무릎 꿇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다. 이들은 카톨릭의 사제들의 사도적 계승 제도나 교황의 제도를 받아 드리지 않는다. 이런 점으로는 이들도 <프로테스탄트>이다. 개신교가 교황제도를 반대했기에 <프로테스탄트>로 여김을 받게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루터가 천주교에 95개 조항을 질문하며 파문을 일으킴으로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게 되었다. 루터는 생명을 내걸고 성경적 확신을 갖고 카톨릭 교회에 도전했다. 사제들의 사도적 전승이나 교황 제도를 반대했다. 믿음이란 교회의 권위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맺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라 믿었다. 우리의 신앙의 기준을 오직 성경 안에서 찾아야 된다는 깃발을 들고 일어선 것이다. 이 밖에도 성모의 무염론이나 승천설, 그리고 십계명의 변개와 우상의 문제에 있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이었다.
물론 영국의 성공회, 이집트의 콥틱, 여러 나라의 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에 관한 구체적인 것을 더 공부하고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본래의 카톨릭 교회의 진정한 의미
로마에서 오랫동안의 핍박과 무서운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지킨 선조들의 믿음 때문에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합법화되었다. 그리고 392년에 기독교가 로마 국교가 되었다. 이는 참으로 감사하고 감격해야 할 일이다. 카톨릭이라는 이름이 <카토릭코스> (Katholikos) 인데 이는 보편적인, 모든 곳에 있는, <공교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안경으로 그들을 내다본 것에 많은 잘못이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카톨릭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 쇄신 운동이라는 성령 운동이나 기도의 영성을 깊게 가진 많은 선조들이 있었던 것도 알고 있다.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교만함과 잘못된 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들도 철저한 미전도 종족으로 인정할 것인가? (유럽 선교사회에서는 이런 결정을 했다는 정보를 듣기도 했다) 아니면 복음이 필요한 재교육의 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이미 복음을 들었으나 변개한 이단처럼 여기고 간과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고민을 하기 이전에 스스로 <개신교, 프로테스탄트> 라고 자부하는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는가? 라는 심각한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
분명 우리 개신교도들에게도 많은 잘못이 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우리가 부끄러운 일을 많이 하고 있다. 건물 중심의 대형 예배당의 건축에 신경을 쏟지만 사회 속에서는 복음의 증인의 삶을 살지 못함으로 온갖 비난의 대상이 된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수 없이 갈라지고 찢어지고 파괴된 교회 간의 싸움과 갈등으로 너무 많은 교파들로 사분오열 되었다. 총회장, 노회장, 대표장 등 정치적 싸움, 재물의 싸움, 감투의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신학교가 이권 다툼으로 분리되어 연합의 모범을 보이지 않는다. 개신교라는 이름 앞에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개신교도 이단이라고 불릴 수 있다
우리는 선교라는 이름으로 가장 복음적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선교 현장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를 볼 때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정교회의 눈으로 본다면 우리도 카톨릭과 동일하게 이단이다. 저항한다는 뜻의 <프로테스탄트>는 그들의 눈에 이단인 것이다. 이단이 우리에게 접촉을 하려 한다면 우리는 어떤 방어벽을 만들가? 바꾸어 우리에게 무슬림이 다가오면 어떤 방어막을 칠까? 우리는 무슬림이나 카톨릭이나 정교회 사람들을 보며 무척이나 안타깝고 불쌍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우리를 같은 느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쯔쯔쯔… 어쩌다가 기독교인이 되었을까? 어쩌다가<프로테스탄트>가 되었을까? 어쩌다가 이단에 빠져 헤매고 있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공회 사제 존 스타트를 통해 받은 놀라움
영국에서 훈련 중에 <존 스타트>를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몇 마디를 나눈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분은 나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 나는 잠시 그가 목회하는 <All Souls Church> 에서 예배를 드렸고, <현대 목회> 라는 주제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크게 놀란 것은 그가 영국 카톨릭인 ‘성공회의 사제’였다는 것이다. 어떻게? 성공회에 이런 ‘강한 보수적 개혁주의자’가 있을 수가 있을까?
영국 성공회는 헨리 8세가 여러 번 이혼하고 그것을 정당화 하기 위해 로마 카톨릭을 떠나 새로 설립한 것이다. 그런 성공회에서 이런 훌륭한 신학자가 나왔다는 것이 놀랍다. 그는 성공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 안에서 개혁을 이룬 것이다. 선교의 대 학자인 <크리스토퍼 라이트>도 성공회 사제이다.
죽은 교회 안에 살아있는 거룩한 자, 능력 있는 자가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대 교회는 “살아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로다.” 라고 하였다. 사대 교회는 죽은 교회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요한계시록 3장 4절에 “그런데 사데에 그 옷을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내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죽은 교회 안에 살아 있는 거룩한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개신교도인 우리를 저들이 “이단, 저항자인 프로테스탄트” 로 여기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러한 우리가 어떻게 천주교인이나 정교회인이나 성공회인이나 더 나아가 무슬림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여지고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미전도 종족이나 다른 종교의 사람들을 전도하기가 쉬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기독교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시작된 개신교가 아닌 다른 종파의 사람들을 전도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라 짐작한다. 그래도 온갖 핍박과 고난을 이기며 오늘에 이른 기독교의 선조들을 돌아본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철저하게 가까이 가야함이 당연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선교의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인가? 다른 방법은 없다. 철저하게 빛과 소금, 말씀의 실천, 거룩한 행동, 영향력 있는 능력의 삶,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는 개신교의 놀라운 열매를 보여 주는 길 외에는 없는 것 같다. 연합과 성실한 삶, 깊은 영성과 말씀의 열매, 그리고 살아 있는 하나님의 영향력 있는 능력의 삶을 보여 주는 길 외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