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선교지로 떠나며… / 조현민 선교사(코소보)

Come Mission의 킹 살렘 훈련원에 온 지도 벌써 1년 반이 훌쩍 넘어갔다. 훈련원에 입소하면서 미국에서의 훈련이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 기대하지 않았던 긴 시간이 이렇게도 빨리 지나갈 줄은 더욱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모든 기대치 못했던 일들의 정점에는 한 치도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항복하는 마음으로 올라탄 그 분의 상상을 초월한 롤러코스터 라이드가 있다고 하겠다.

2010년에 단기 선교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내가 선교사가 될 것이라고는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선교지들을 방문할 때마다 상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개입 사건들을 경험했고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이 뜨거워졌지만 그 뜨거움은 늘 그리고 곧 선교에 대한 공포(?)에 압도되어 차갑게 식어졌기에 나는 글러 먹었다고 아니 가장 너그럽게 봐줘서 선교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라고 생각해 오고 있었다. 20년 이상을 쉬지 않고 생각하고 있던 교회 개척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2019년경부터 더욱 구체적으로 기도해 오고 있었는데 2020년 미국에 팬데믹이 터지고 말았다. 내가 섬기고 있던 교회는 팬데믹을 이겨 내기엔 너무도 작은 교회였을까? 오래지 않아 재정적인 압박에 거세지고 EM(영어부) 담당 목사였던 나는 EM 부서와 함께 교회의 재정적 위기 상황을 헤치고 나가기 위한 제1순위의 정리 대상이 되었다. 

결국 2개월의 유예기간 후 2021년 1월 말에 EM 부서는 폐지되고 나는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이 두 달의 기간 중에 ‘1. 교회 개척 2. 기존 교회 사역지 찾기 3. 선교’라는 3가지의 기도 제목을 정하고 꾸준히 기도했다. 번호 매김에서 볼 수 있듯이 내가 가장 원하던 것이 당당하게 1번이요 오랫동안 가장 피하고 싶었던 것은 뻔뻔하게 3번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6개월간 더 이어진 기도 가운데 하나님은 나의 ‘Wish’ 리스트를 들어 거꾸로 매어 다셨다. 

다시 읽어 보니 1. 선교…다른 두 개는 어디로 가 버렸는지 종이에서 잉크가 부스러져 떨어져 버렸나 싶었다. 하지만 주님은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으시고 이 기간 동안 나의 마음에서 두려움을 비워내 주셨다. 내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두려움이 쓸려 나간 자리에 비로소 선교에 대한 기대와 설렘과 기쁨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비우지 않고는 채울 수 없다는 진리가 나의 비겁함으로 인해서 실존이 되지 못하고 있다가 주님께서 은혜로 나의 삶을 만져 주신 순간 비로소 그분이 주신 자유 위에 서 있는 나를 다시 발견하고 선교사의 길을 가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선교에 관해 전적으로 무지했던 나는 혼자서 선교 훈련 계획안을 짰다. 나름 거창하게 풀어놓은 계획의 1단계는 ‘영성 회복’이었다. 세상의 부요가 차고 넘치는 오렌지 카운티와 샌디에고에서 19년간 사역하면서 나의 영성은 빈곤의 처지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이 상태로는 선교지의 도전적인 삶을 헤쳐 나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1차 선교 훈련의 슬로건을 ‘도전적인 매일의 일상에서 주님을 Enjoy하기’로 정했다. 그리고 2차로는 그 당시까지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던 동부 아프리카 선교에 필요한 스와힐리어, 문화와 인류학 등에 관한 실제적 정보 훈련을 시켜 줄 수 있는 르완다 선교 훈련원에 입소할 계획이었다.

1차 하와이 KONA YWAM 6개월 훈련, 2차 르완다 선교 훈련원 10개월 훈련 그리고 2년의 인턴쉽 계획이 확정되었다. 그런데 원서 제출, 백신 접종, 프로그램 및 숙소 결정, YWAM의 승인 등을 모두 마친 1차 훈련 계획이 마지막 과정에서 흔들거렸다. 두 팀의 중보기도자 약 스무 분들과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그 가운데 얻은 하나님의 응답은 ‘No’였다. 이틀 후 캔자스주에 사는 사촌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LA 동부 모하비 사막에 이재환 선교사님께서 설립하신 킹 살렘 훈련원이란 곳이 있는데 노동 공동체래. 우리 교회 청년이 그곳에서 3달 머물다 왔는데 너무 좋았대.”

특별할 것 없고 부담 가질 필요 없는 짧은 전화 통화였지만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나는 바로 연락해서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2021년 9월 16일에 킹 살렘 훈련원에서 이재환, 이순애 선교사님과 그곳에 머물고 계시던 다른 몇 분의 선교사님들과 처음 만남을 가졌다. 그런데 함께 맛있게 농촌식 점심 식사를 한 후 나눈 대화가 그리 길게 가지 않았을 때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반복적으로 ‘부적격’이란 선고가 잇달아 내려졌다. 선교 전략이나 선교 관련 지식 부재 이전에 선교사로서의 자격 부재였다. 최소한 서너 가지의 부인할 수 없는 나의 과거와 현재의 흔적들은 이재환 선교사님께서 “여기까지 멀리 와 준 건 고마운데 자네는 아닌 것 같아.”라고 말씀하시는 듯 내가 듣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서 계속 기도하는 중에 선교도 포기할 수 없었고 그곳에도 가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단단해져서 중보기도 팀원들과 함께 계속 기도했고 이곳이 ‘그곳’이란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바로 킹 살렘 훈련원에 연락을 드리고 입소 허락을 요청드렸는데 기꺼이 받아 주셨다. 그렇게 해서 2021년 10월 2일,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그러나 겨우 1차 훈련 장소에까지는 도착했다. 첫날 밤에 방에 혼자 앉아 일기를 꺼내 들었다. 오래전 신학대학원 졸업식 때 친구가 준 선물인데 표지에 ‘Streams in the Desert…a devotional journal’이라고 적혀 있었다. 일기장에 처음으로 몇 자를 적어 내려갔다.

“거짓말처럼 사막에서 오늘 첫 일기를 쓴다. 내 마음속에 이름 지은 ‘1차 선교 훈련’ 장소 King Salem Ranch에 입소했다...오후의 간단한 노동은 나의 어깨조차 조금은 가볍게 해 주었다(당시 어깨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진정 이곳은 주께서 인도하신 장소인가?... 저녁상에 둘러앉아 나눈 대화는 흘끗흘끗 나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듯 그러다 또 딴청을 부리는 듯 유쾌하게 흘러갔다…밤에 선 채로 잠시 나눈 한 선교 훈련생과의 대화를 통해서 난 다시 ‘Point of No Return’을 기억해 냈다.”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믿고 입소했지만, 여전히 질문이 끝나지 않았던 나의 모습과 그럼에도 이런저런 질문들을 환영의 마음과 함께 내게 던진 킹 살렘 식구들과 처음부터 쾌활한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그때가 생각난다. ‘이제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다짐으로 그 첫 밤을 덮었다.

이곳이 기도 응답의 장소인가라는 나의 질문에 하나님은 대답하기 시작하셨다. 느슨한 복장으로 아침 공동체 묵상 시간에 참석한 나를 말씀을 통해 만나주신 하나님은 작업화 끈을 단단히 묶고 나선 20에이커 농장 구석구석에서도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인생에 단 한 번도 수도사의 삶을 동경해 본 적이 없는 내게 노동의 기쁨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날들이 쌓여가면서 확신이란 단어가 내 가슴에 박혀오는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애초에 가려고 했던 KONA YWAM 역시 하루 종일 예배가 넘치기에 주님을 Enjoy 하기에 거기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은 나의 1차 선교 훈련 목표처럼 매일매일의 도전을 느끼게 해 주는 곳은 전혀 아니었다. 많은 강의가 넘쳐나지만 ,카리브해에 휴가 온 사람의 여유가 있는 곳이다. 반면에 킹 살렘은 하늘과 땅, 그리고 그 건조한 땅 위에 서 있는 대추나무와 나만 있는 곳이다. 척박함에서 시원한 것을 찾으려면 오로지 하늘을 올려다보아야만 하는 곳이다. 타는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푸릇푸릇한 잎이 아직 선명한 대추나무 아래에 햇볕에 삭은 나무 의자 둘을 놓고 주님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교제했던 기억은 내 인생 내내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기억이 될 것이다.

“노동과 선교 훈련이 무슨 관련이 있는가?”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훈련은 없겠지만 나에게 이 광야의 킹 살렘은 야곱과 모세와 200만 이스라엘과 다윗과 엘리야와 예수님을 하루에 모두 만나기에 시간이 넉넉한 곳이다. 이곳에 머물면서 선교 훈련이 단순히 지식과 전략을 가르치는 과정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고 ‘도전적인 매일의 일상에서 주님을 Enjoy 하기’란 나의1차 훈련 목표 역시 나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님을 비로소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곳이 선교에 관한 지식과 전략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곳은 더구나 또 아니었다. 나의 배움은 중세 시대의 길드(Guild) 안에 존재했던 도제(Apprenticeship)처럼 이루어졌다. 기술자 스승과 일대일로 기술을 배우고 전수받는 직공처럼 매일 매일 직공 조현민 훈련생은 시도 때도 구분할 필요 없이 아무 때나 어떤 질문이라도 기술자 이재환 선교사에게 할수 있었다. 세상에 과연 몇 명의 선교 후보생이 이런 훈련을 받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을까? 게다가 이 선교 기술자는 자기직공이 다른 기술자를 기웃거리는 것도 불편해하지 않았다.오히려 다른 기술자들의 많은 서적을 추천해 주었다. 심지어Come Mission 울타리 안에 있는 자신의 제자들의 책까지도 추천해 주었다. 다만 나의 게으름으로 좀 더 풍성해질 수 있었던 훈련이 아쉽게 마쳐진 것에 후회가 있을 뿐이다. 

그 와중에 이번엔 나의 선교지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나님의 롤러코스터는 동부 아프리카 탄자니아와 르완다를 중심으로 한 5개국에서 출발해서 말레이시아로, 다시 돌아 동아프리카 에티오피아를 찍고 결국 발칸반도의 코소보에 멈추었다. 하지만 대륙을 넘나드는 이 정신을 쏙 빼놓을 만한 롤러코스터 라이드는 ‘Wonderful’이라는 이름을 가진 운전자의 불가사의한 스킬로 인해 탑승객인 내 어깨 한번 까딱거리지 않게 하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었고 기대할 수 없었던 나의 처지였지만 지난 1년 반의 훈련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모든 사람들의 눈에도 기이할 정도로 모든 것은 홀린 듯 모습을 갖추어 갔고 주님은 혼돈의 물감통 속에서 결국 정교한 그림을 그려 내셨다.

특히 힘에 부치는 초보 선교사에게 같은 처지의 초보 주 파송교회와 초보 협력 파송교회를 허락해 주시고 모두 초보끼리 발칸 선교의 개척을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그분의 무모하신 신뢰에 기쁘게 항복한다.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우리가 이 여정을 함께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격적이다. 나를 보내주시는 교회들, 하나님의 뜻을 함께 분별하며 가고 싶은 중보기도자들과 후원자들, 나의 선교 여정의 첫 모유 수유부터첫 걸음을 걷기까지 부모가 되어 주신 Come Mission 동지들모두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드리며 앞으로도 이 여정에 동행해 주시기를 요청 드린다.

그런데 오늘 묵상 중에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 (혹은 또 그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 모두 이루기 전 시편 72편에 기도문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읽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와 그의 선조들에게 미리 약속하셨던 것들을 다윗은 구했고 그 간구한 모든 것을 하나님은 그 세대에 모두 철저하게 이루심으로 사람을 향한 당신의 신실하심과 성실하심을 완전하게 증명하셨다. 문제는 인간이었다.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쏟아부어 주신 ‘판단력과 공의’는 얼마 가지 못해 솔로몬에 의해 무참히 버려졌고 시편 72편의 다른 모든 기도들의 응답은 하나님에 의해 폐기되어 나라와 왕조는 결국 망하고 말았다. 

첫 선교지로 떠나는 즈음에 나를 다시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말씀이다. 지난 18개월간 하나님은 나와 중보기도자들의 기도 이상으로 응답해 주시며 발칸 선교의 길을 닦아 주셨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특별해 보일 것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이 시간들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먹고 마시며 숨 쉬고 살아온 당사자에겐 이것이 다윗의 가문에 이루신 하나님의 일보다 조금도 못 하지 않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압도된 이 마음은 늘 나와 함께 있어 줄까? 남은 시간 동안 나의 시편 72편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 기대와 두려움을 함께 간직하고 길을 떠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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