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선교적이다
개인적으로 선교적 교회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교회는 선교적이다. 선교적이어야 하고, 선교를 뺀 교회란 존재할 수 없다. 교회와 선교는 나눌 수 없는 것인데, 이 둘이 마치 특별한 관계인 것처럼 나타내는 표현에 마음이 편치 않다. 살아있는 사람은 36.5도의 체온을 뿜어내고 있는 것처럼, 살아있는 교회는 선교의 열정과 불꽃을 뿜어낸다. 살아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살아있는 교회는 움직인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주셨는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 소식을 전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수께서 주신 영생이 무한정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때가 정해져 있는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것은 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가 누구인지 알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면, 대속이 어떤 사건인지 알면 그 사람은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반드시 행동한다.
선교가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다. 선교가 없는 교회는 움직일 수 없는 중병에 걸려있거나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잃은 존재다. 교회는 선교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선교를 위해 존재하고 교회는 선교를 통해 자신들의 예수 DNA, 성경 DNA를 퍼트린다.
선교를 위한 교회되기
교회를 개척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마음 중에 하나는 세계선교를 마무리하는 교회의 반열에 함께 서는 것이었다. ‘우리가 하겠다!’라는 거창한 표현보다는 주님께서 그 일을 이루어 가실 때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교회가 되길 원했다는 것이 더 맞는 것같다. 몇몇 지역교회 목사님들께 물었다. ‘재정의 80%를 선교에 사용할 수 있습니까? 60%는 어떻습니까? 50%는 가능합니까?’ 아예 대답을 안하시는 분도 계셨고 웃으면서 한 번 해보라는 분도 계셨다. 현실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쉽지는 않지만 못해볼 것은 없었다. 이미 8년간 동역하고 있던 선교사 한 분을 파송선교사로 주보에 넣어놓고 후원과 기도를 시작했다. 청년 몇 명이 모여서 월 1,500 호주 달러를 모아 후원을 시작했다. 나보다 먼저 다윈에 교회를 개척해서 섬기고 있는 후배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교회의 생존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더 쓰시길 원하시면 생존은 책임지실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사명을 위해 존재하자. 사명을 위해서 살자! 다음교회를 개척하고 처음부터 외친 말이었다.
교회의 계좌를 열고나서도 다함께 그 계좌 개설 확인서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이 계좌가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창고가 되지 않고 열방을 먹여살린 요셉의 창고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오병이어의 도시락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요청을 첫번째 순위로 두었다.
매해마다 선교사를 한 가정씩 파송했다.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았던 다섯번째 해에는 교회를 분립해서 개척했다. 멈추지 않았다. 헌금이 늘고 성도가 늘고 교회가 망하지 않았다. 세상의 방식으로는 문을 닫아야 했는데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다. 안타깝게 고정비의 증가로 선교에 쏟는 재정의 %는 점점 줄어갔지만 다음교회에서 100가정의 선교사를 파송하기 원했던 첫 마음을 따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고 투자해서 선교라는 하나님의 열정에 함께 하고자 했다.
커다란 간격
시드니 다음교회 개척 후 첫번째 7년의 사역을 돌아보면서 한 가지 커다란 간격을 느꼈다. 개척하고 교회를 섬기는 담임목사로서 선교를 이끌어가고 있는데 성도들의 체온은 다른 것이었다. 결단을 해야 했다.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선교로 조정이 필요했다. 선교에 대한 커다란 지각변동이었다. 거기에는 젊은 세대들로 이루어져 이제 막 가정을 이루고 절찬리에(?) 출산을 하고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던 성도들의 현실반영이 있었다.
지난 7년, 두번째 사역의 기간들은 몸을 낮췄다. 성도들이 선교에 동참하고 함께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문을 열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있는 선교에 대한 열망을 낮출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과 절대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속도를 줄이고 느슨하게 만들어서 담임목사의 선교가 아니라 다음교회의 선교가 되도록 수위조절을 했을 뿐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두번째 7년의 시간이 지났다.
새로운 기회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교회들이 침잠해있고, 이제 막 움직여보려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다음교회도 선교에 대한 새로운 도약을 고민하고 모색하고 있었다. 이재환 선교사님의 방문과 선교 집회, 그리고 요나선교학교는 그런 의미에서 다음교회에게는 가뭄의 단비같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가장 큰 축복은 선교에 대한 보편적 하나님의 뜻을 공동체에 풀어주신 것이다. 비밀이라는 단어로 풀어가기 시작한 선교에 대한 해설은 성경을 흑백으로 보다가 총천연색으로 보게 된 사건이었다. 이재환 선교사님의 깊고 풍성한 주해를 바탕으로 선교를 주제로 한 새로운 성경읽기는 다음교회 성도들의 눈을 열어주기에 충분했다. 선교에 무관심하고 별 마음이 없던 분들까지도 선교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고 ‘선교가 성경적이구나. 선교를 하는 것은 교회가 꼭 해야 하는 일이구나!’라는 기초와 풀뿌리 차원의 동의와 공감의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두번째 큰 축복은 선교사님이 가지고 계신 교회 중심적인 사고와 사역철학이다. 처음에는 좀 놀랐다. 선교단체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선교는 교회가 하는 것이라는 명제를 침범하지 않고 교회중심적으로 사고하고, 교회의 선교를 세우기 위해서 사역하는 모습은 지역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사의 입장에서는 믿을 수 있는 우군을 만난 편안함이었고 함께 할 수 있다는 든든함이었고, 그동안 다른 길을 왔지만 오랜 기간 같은 길을 걸어온 것 같은 동지를 만난 애정이 시작되었다.
세번째 이 집회의 축복은 선교에 대한 몇 가지 부분에서 초점이 더 정확해졌다는 것이다. 아마 이 부분은 다음교회의 선교를 바라보면서 적용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고 남겨진 숙제라고도 여겨진다. 그러나 이 작업까지 마쳐야 이 선교 집회와 요나선교학교가 비로소 끝나게 되는 것 같다.
남은 과제들
먼저 할 일은 선교가 교회의 일, 즉 나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의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선교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프로그램도, 몇 사람의 전유물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면 모든 성도와 교회들이 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나의 일로 받아들이도록 격려하고 지속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28장에서 선교를 명령하실 때, 그 자리에는 12명의 제자만 있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부활의 명단중에 5백여 형제는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모인 숫자일 것이다. 주님은 전교회에 말씀하셨다. 전열방까지 전하고 제자삼으라는 전복음명령은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이 선교를 명령하시면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주님께서는 처음 선교를 명령하셨던 그 첫번째 공동체에게 이 명령을 주시는 것이지만, 동시에 주님이 다시 오시기 직전에 존재하게 될 마지막 공동체에게까지 이 명령을 주시고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주님은 그 때까지 교회와 함께 하실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영이신 성령으로 함께 하시며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 사마리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할 때 능력과 권세가 되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지금의 선교를 돌아보는 것도 해야 하는 일이다. 현재 다음교회의 선교는 성도들을 중심으로 개인적인 관계가 있는 선교사를 후원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의 기회 균등이라는 의미로 본다면 이미 복음이 들어간 곳에 후원하기도 하고, 오랫동안 열매가 없는 곳에서 사역을 이어가는 경우도 있다. 복음을 듣지 못한 곳,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곳, 복음을 왜곡되이 듣고 예수를 알 수 있는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가야 한다. 앞으로의 초점은 분명하고 정확하게 그곳에 맞추어야 한다.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젊은 선교사 후보생들이 없는 이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파송의 기회들이 있다.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어떤 희생과 수고를 지불하더라도 복음을 가지고 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복음이 첫번째가 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이유로 선교가 막히거나 미뤄지면 안된다. 그것을 기뻐하는 것은 오직 사단의 권세와 그 하수조직들 뿐이다.
선교지를 밟고,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을 가서 그들을 만나고 그들의 음식을 먹고 그곳에서 잠을 자고 그들과 친구가 되는 일들은 성도들이 선교에 대해서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길이다. 현재 3대가 함께 하는 선교로 어릴 때부터 선교지를 밟고 방문하고 그 땅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도록 했다. 그리고 팬데믹으로 잠시 멈춘 중동 지역에 대한 방문을 재개하고, 그것을 제자훈련과 사역훈련과 연계해서 모든 성도들이 선교적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 과정을 제시하는 일을 지속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이다. 기도하는 곳이 선교지의 최전선이고 기도하는 곳이 사단의 궤계가 무너지는 곳이다. 기도하는 곳이 영적전쟁의 한복판이고 기도를 통해서 성패는 갈린다. 교회가 모일 때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고,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도록 재헌신의 마음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요나선교학교를 통해 골방을 기도실로 만들고, 한 나라와 민족을 품고 평생 기도하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았다. 무릎 선교사들이 기도로 세계를 움직이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도록 세우길 원한다.
요나선교학교가 끝나면서 이제는 우리가 해야할 일이 남아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글을 정리를 하다보니, 어쩌면 선교 집회와 요나선교학교는 끝나지 않고 우리의 일상속에 지속되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고 그것이 성령의 요청이며 그것이 성경의 안내이다. 오랜만에 귀가 번쩍 뜨이고 눈이 반짝거리도록 값지고 수준 높은(?) 강의를 들었다. 성령 안에서 가슴에 다시 불이 일어나는 경험이었다. 하나님의 열정은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다. 우리가 때로 멈추고 때로 잊고 때로 머뭇거릴 뿐이다. 하나님의 열정을 곳곳에 일으켰던 그리고 앞으로도 일으킬 귀한 선교 집회와 요나선교학교로 인해 우리를 다시 주님과 연동시켜주신 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