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 따라다녔던 어린 시절
저는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를 따라 절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아버지께서 1955년에 교환 의사로 미국에오신 이후로 한국에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랫동안 헤어져 사시던 부모님이 마침내 이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13살에 학생 비자를 받고 미국에 와서 가톨릭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결혼하고 미국 시민권을 받았습니다. 새어머니도 의사이시기에 경제적인 고난은 없었습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믿을 것은 저 자신밖에 없다고생각하며 자립할 때만을 기다리며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교통사고를 통해 만난 주님
결혼하고 시카고에서 60마일 떨어진 대학촌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시카고 중심부로 이사한 후 자동차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어려움 가운데 전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기도로 10년간 아팠던 허리가 치유를 받게 되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초신자였지만 교회에서 목사님의 한국어 설교를 영어로 동시통역하면서 성경을 많이 배웠습니다. 교회 생활이 재미있었습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성령 세례를 받았으며 열심히 믿음 생활을 했습니다.
회사 운영을 통해 다시 경험하게 된 주님
그리고 주님이 함께 하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미국 공립학교 전산 시스템을 개발하는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자신만 믿으며살다가 주님을 의지하며 살게 되었으니 매우 평안한 마음으로 회사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주님을 모르고 잘난체하며 살던 제가 매우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니 여전히 제 실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세상적으로회사를 운영했던 것 같습니다. 회사 운영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재정적 책임감 때문에 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고 모난 제 성격이 많이 다듬어졌습니다. 회사가 돌아가는 고비고비마다 어려움을 겪으며 저는 완전히 부서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바로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저를 불쌍히 여기사 고난의 용광로에 집어넣으시어 지금의 저를 만드셨습니다. 저는 할 수 없지만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를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장춘원 목사님을 통한 선교 도전
저는 시카고에서 기도원을 부지런히 다녔습니다. 한동안은 기도원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기도원에서 장춘원 목사님의 선교 간증을 듣고 선교에 불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선교 이야기가 통하지 않아 매우 답답했습니다. 회사를 거의 다 정리하고 딸을 돕기 위해 라스베가스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라스베가스의 한인 교회에서 개최하는 인터콥의 훈련을 받고 선교사로 헌신하고자 하는 소명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장춘원 목사님 교회에서 실시하는 단기 선교에 참여할 기회가 있어서 인도를 2주간 다녀왔습니다. 그후 라스베가스 순복음교회 전도사님이 베트남에 같이가자고 하여 2016년에 6개월 동안 조나단 선교사님의 선교 베이스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사역을 하며 현지인들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후 계속하여 그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을 섬기고 싶었던 소원
시카고에서 살 때, 아들을 방문하러 콜로라도에 가면 아들이 스키를 타러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산 위에 멋진 큰 집을보면서 저렇게 공기 좋고, 물 좋고, 경치 좋고, 기도가 절로 나오는 곳에서 피곤하고 지친 선교사님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킹살렘 농장 훈련원을 방문했을 때 이순애 선교사님이 컴미션 미국 본부 사역에 대한 도전을 하셨습니다. 선교사님들을 섬기고 싶다는 그 바람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인가? 묻게 되었습니다. 라스베가스에서 LA에 위치한 컴미션 미국 본부로 운전하여 오면서 그때생각이 문득 났습니다. 나의 작은 바람까지 이루어 주시는 주님…. 다시 한번 감동을 받으며 감사드렸습니다. 기도를 드린 적은 없었는데, 나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주님…. 벅찬 설렘과 감사함으로 미국 컴미션 본부로 달려갔습니다. 마음 한편으로는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소문을 듣자하니 본부 사역이 엄청 힘들다고 들었는데…”
어머니가 되고자 본부로 입성
두려워하는 제게 이순애 선교사님이 말씀하시기를 본부에는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어머니가 되어 주세요” 하셔서 ‘그것은 할 수있겠지’라고 생각하며 두려운 마음을 달래며 본부로 들어왔습니다. 믿지 않는 아들은 “엄마, 일을 하고 싶으면 돈을 벌어서 없는사람들 도와주시지”라고 말하고 믿음이 좋은 딸은 “여기도 봉사할 곳이 많은데 왜 LA까지 가야 해요?”하며 은근히 불안해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주님이 부르시는 곳에서 할 수 있을 때까지 해야지”라고 말하자 제 딸은 다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우리하고 같이 살아야 하지 않아요?”라고 하였습니다. 12살 먹은 손자는 “이제 노예 제도는 폐지된 줄 알았는데요.” 손자는 무보수로 봉사하는 것이 마치 노예처럼 일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엄마를 잘 아는 아이들은 더 이상 말리지 못하였습니다.
예배와 북 쉐어링과 찬양
본부에 들어오니 너무 좋습니다. 교회가 아래층에 있어서 새벽 기도도 걸어갈 수 있고, 저녁에는 교회에 내려가 피아노를 치며찬양하며 기도도 실컷 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는 스태프들하고 성경 말씀 나누고, 일주일에 한 번씩 북 쉐어링도 합니다. 너무 하고 싶었던 북 쉐어링을 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이수현 선교사 부부가 M국으로 떠나면 어떻게 하지? 걱정이 슬그머니 올라옵니다. 앞문 벨이 울리면 무릎이 별로 좋지 않아서 빨리 움직일 수가 없는데 배려를 해 주셔서 대신나가 주시니 너무 감사한 마음입니다.사무실에서 이창헌 선교사님과 이수현 선교사님이 기타를 치고 은지 선교사님과 같이 찬양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비디오를 찍어서 훈련원에 계신 이순애 선교사님께 보내면서 마치 엄마가 아이들 재롱을 비디오 찍어할머니께 보내는 것 같아 재밌습니다. 이수현 선배 본부 선교사님이 얼마나 꼼꼼하게 매뉴얼을 만들어 주었는지, 쉽게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주님이 여기에 있기 원하시는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하여 주신 업무를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부탁의 말씀
걱정이 되는 것이 한 가지 있어서 부탁드립니다. 제가 한국어가 짧아서 편지를 쓰는 것이 쉽지 않아 모든 Come 선교사님들, 선교관을 방문하실 분들이 이메일을 받으실 때에 간단히 업무만 답해 드린다 해도 쌀쌀하다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제 한국어가 중학생 수준이라서 이상한 옛날 말을 써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섬기도록 이 자리로 불러 주신 주님께 감사를 올려 드리며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열심히 본부 사역에 임하겠습니다. Come의 식구로 받아 주신 이사님들과 여러 선교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