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그렇게 바울을 뜨겁게 달구었나? / 이재환 선교사(컴미션 국제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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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선교사로 지원을 하였나요?”

선교사 지원서를 낸 후보생과 인터뷰를 할 때 처음으로 물어보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그동안 선교사로서, 동원가로서, 그리고 훈련가로서 많은 선교사 지망생과 선교사들을 만나보았다. 이 질문에 대답하는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본인이 선교사로 지원하게 된 동기를 진지하게 말하곤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많은 분들이 선교사로의 부름(Calling)과 사명(Assignment)의 관계를 혼란스럽게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선교를 택했다는 분도 있고, 인생을 보람 있게 살기 위해 선교사의 길을 선택했다는 분도 있었다. 어떤 분은 주를 위해 고난의 길을 택했다고 하였다. 초기에는 전혀 선교에 관심이 없다가 선교사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이제는 그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며 선교를 선택했다는 분도 보았다. 가족적 분위기를 소명으로 생각한 선교사 지망생이었다. 이와 같이 어정쩡한 가운데 소위 ‘부르심을 받았다’라고 생각하며 선교사로 지원하신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러한 현상을 보며 지구촌 교회를 개척한 이동원 원로 목사님은 설교 가운데 “하나님도 매우 급하신 모양이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런 불분명한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섭리에 놀랄 뿐이다. 선교사로서의 자질들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고, 선교의 정곡을 찌르는 확실한 성경적 논리성이 없어도 그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선교에 부르심, 소명(Calling)이 있을까?

선교의 부르심과 소명에 대해 성경을 거울삼아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선교사로서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았다. 이들이 받은 소명은 구약을 통해 살펴보면 절대적인 하나님의 섭리에 근거하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부르심이 없다면 그 누구도 제사장, 선지자, 선견자, 왕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강한 부르심이 신약 시대에도 동일하게 존재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9장 23절에 제자로의 부르심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제자의 삶은 부르심이 아니라 자발적인 도전이다. 그러나 구약적 ‘부르심’에 묶인 사람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보다는 실질적인 부르심을 기다리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부르심이 도리어 선교사로서의 도전에 발목을 붙들기도 한다. 선교는 하고 싶은데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이 없어서 선교사로 갈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구약의 ‘소명론’이 오히려 선교의 ‘사명’을 방해하는 교리적 함정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미 예수님을 믿을 때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 시대에는 소명과 사명을 구분하기보다는 소명이 사명이고, 사명이 소명이라고 보는 것이 무난하다. 즉, 우리 모두가 선교에 부름을 이미 받았다는 것이다. 선교에 제외된 성도는 있을 수 없다. 우리 주위에는 선교사의 길을 준비하며 하나님의 음성이나, 환상이나, 예언이 그들을 선교사로 불렀다고 간증을 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런 간증을 들을 때면 이러한 현상을 경험하지 않은 많은 성도들이 ‘아, 나는 아니구나!’하며 그들의 사명감에 불을 끄고 마는 실수를 하게 될 것이 우려스럽다.

바울은 우리에게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려 주고 있다. 그의 삶은 진정한 부르심과 사명, 의무와 책임감 그리고 선교의 올바른 정의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고린도전서 4장 9절 이하에 바울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라고 고백했고,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후에는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 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선교 여정 속에서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 괴로움과 외로움, 감옥과 채찍을 묵묵히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가 기록한 13권의 신약 성경에는 이러한 고난으로 인하여 복음 전파를 후회하거나, 사역을 포기하거나, 낙심하는 장면이 한 곳도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이 사도 바울을 이토록 강한 선교사로 만들었을까?

바울이 선교사로 부단히 일어난 것은 앞에서 예를 든 선교사 지망생들의 선교 동기와 구분된다. 그는 특별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고백하며 고난의 선교적 삶이 소명이 아니라 ‘사명’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의 비밀

사도행전 26장 18절과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라고 감히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담대히 고백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1절과 12절에서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고 증언한다. 이와 같이 복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넘치는 확신은 바로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에베소서 3장 1-9절에서는 그가 어떻게 이방인의 선교사로 살게 되었으며, 그의 생의 목적이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 이라는 비밀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확실한 선교적 사명은 바로 이 비밀의 계시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비밀이 바울 자신의 삶에 클릭 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처럼 바울은 계시도 받고 선교를 향한 비밀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가진 선교사였다. 그의 선교사로서의 고백은 소명과 사명이 어우러진 최고의 확신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순종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도 바울처럼 분명한 선교적 사명을 천명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동원과 훈련 과정에서 후보생들로부터 마치 김 빠진 것과 같은 고백을 들을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놀라기는 하지만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을 느끼곤 한다. 이러한 선교적 동기를 가지고 어떻게 마태복음 24장 14절의 선교적 종말을 기대할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우리는 선교의 동기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교의 동기 1 - 복음에 빚진 자?

사도 바울의 선교 동기를 로마서 1장 14절에 근거해서 찾아보았다. 바울은 자신을 ‘복음에 빚진 자’라고 했다. 우리 모두가 복음에 빚진 자이다. 누군가 내게 복음을 들려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믿게 된 것이다. 구세군을 창시한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의 말대로 “나를 구원 함은 타인을 위함이라”는 것이다. 가장 기초적이며 당연한 복음 전파자의 사명은 복음에 빚진 자에서 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를 아프리카로 보낸 중요한 선교의 동기는 이 빚진 자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이 빚진 자의 양심적 동기 때문에 그 어려운 길을 갔을까? 이유가 타당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이 빚진 자의 심정은 있어도 빚을 갚지 않고도 가책을 느끼지 않고 살기 때문이다.

선교의 동기 2 - 책임감?

이 본문은 다른 의미도 담고 있다. 책임감이다. 선교는 바로 복음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를 동반한 자발적 도전이다. 마태복음 28장 19절 이하에 기록된 위임령은 선교의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우리 모두를 도전하고 있다. 이 위임령에서 제외된 그리스도인은 없다. 앞서 살펴본 대로 소명론은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 선교사가 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켜 선교를 막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선교는 부르심이 아니다. 바로 사명인 것이다.

선교의 동기 3 - 부득불 해야 할 일?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서 바울을 뜨겁게 만든 선교의 동기는 “부득불 해야 할 일”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의무감을 뛰어넘어 강제적으로라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과연 바울이 화를 당할까봐 그토록 어려운 길을 갔을까? 구약의 선지자 중에서는 모세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득불 해야 할 일이기에 마지못해 순종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도 그들처럼 마지못해 순종했을까? 그렇지 않다! 혹시 우리 중에도 억지로 선교의 길을 걸어가는 자가 있을까? 그동안 나는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선교지로 가는 선교사들도 만나 보았다. 그러나 그런 사역은 매우 어렵고 힘겨운 사역이 되고 말 것이다.

바울을 바울 되게 한 가장 멋진 선교적 동기는 무엇일까?

로마서 11장 13절에서 바울은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여기에 ‘영광스럽게 여긴다’라는 말이 헬라어로 ‘독사조(doksazo)’이다. 바울의 사역은 고난의 행군처럼 날마다 고통스러운 일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늘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눈에 보이고 피부에 닿는 고통을 뛰어넘는 기쁨과 환희와 감격과 감동이 그의 영혼을 가득 채웠다. 

처음에 나는 한국어 성경이 제대로 번역된 것인지 의심했다. 헬라어 ‘독사조(영광)’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감히 사람이 사용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그래서 여러 영어 성경의 번역본을 살펴본 나는 놀랐다. 주요 번역본들이 본문에 대해 직역을 피하고 의역으로 번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Magnify my ministry”(나의 사역을 위대하게 여긴다). “Pride in my ministry”(나의 사역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성경은 헬라어를 직역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I glorify my ministry!”(나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라!). 바을을 바울되게 한 가장 먼진 선교적 동기는 바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사역에 본인이 이방인의 선교사로 일하는 것”이었다. 감격, 감동,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최고의 속성인 ‘영광스러움’에 참예하는 것이 선교 사역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과 같은 사역에 참여하고 있음을 인지하여 행복하고 환상적인 선교 사역에 올인했으면 좋겠다. 부족한 종도 감비아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한 선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바울의 고백 때문이었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 곁에 간 선교사님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글을 마칠 수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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