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는 최고의 인생 학교이다 / 이재환 선교사 (미국본부 대표)

십계명은 어떤 글자로 새겨졌을까?

2019년 여름, 출애굽기를 묵상하며 십계명을 기록한 글자가 어떤 것이었을까? 큰 의문이 마음에 자리 잡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유튜브에서 ‘팀 마호니’라는 사람의 라는 출애굽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는데 이 다큐멘터리가 내 안에 소동을 일으킨 것이다. ‘팀 마호니’도 “하나님이 어떤 글자로 십계명을 적으셨을까?”라는 질문 앞에서 큰 혼란에 빠졌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예수를 믿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신학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이에 대한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십계명이 히브리어로 기록이 된 것이라고 아주 쉽고, 매우 단순하게 확신하며 살아온 것이다. 출애굽 사건은 주전 14세기 일어났는데, 그 당시에는 히브리어 글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히브리어 알파벳은 주전 7세기쯤 만들어졌다고 한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그제야 깨닫고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관련 정보를 찾아보았다. 어떤 이는 “기독교는 가짜다. 하나님이 글자가 없는 시절에 십계명을 기록했다는 것이 틀렸다.”라고 기독교를 비방하는 글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팀 마호니’의 도전과 ‘김승학’의 떨기나무

‘팀 마호니’는 틀림없이 글자가 있었을 것을 확신하며 전 생애를 걸고 출애굽의 여정을 따라 광야를 뒤지기 시작했다. 20년이라는 세월을 이를 위해 바쳤다. 이때쯤 한국에서 <떨기나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사우디의 한 왕자의 주치의로 일했던 ‘김승학’이라는 분이 쓴 책이다. 그는 ‘론 와이어트’라는 분의 “시내 산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다.”는 비디오를 보고 사우디아라비아를 20여 차례 걸쳐 탐험했다. 수많은 생명의 위험과 핍박을 받아 가며 그 경험을 담은 이 책은 “시내 산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다.”라고 진술하고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 출애굽의 경로가 시나이반도가 아닌 사우디아라비아 광야라고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여러 흔적을 통해 증명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 책이 100쇄 이상 출판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별 흥미 없이 그 책을 읽었는데 ‘팀 마호니’의 영상을 보고 새로운 도전이 내 안에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사우디 입국 여행 비자 취득

2019년, 사우디 입국 여행 비자를 얻게 되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땅의 입국을 기도해왔던가? 매우 감격스러웠다. 사우디아라비아 광야를 방문하는 목적이 아니더라도 이슬람의 종주국인 이 땅을 얼마나 밟고 싶었던가?

3일간의 리야드 한인 교회 집회 후 시내 산이 있는 타북 공항으로 날아갔다. 켄 안 선교사와 함께 이미 여러 차례 탐험을 동행했던 서 집사님을 앞세우고 시내 산으로 향했다. 나의 기대는 광야의 여정에 있지 않았다. 시내 산 어딘가에 틀림없이 남아있을 글자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출애굽의 여정이야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므로 이쪽이든 저쪽이든 내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나의 관심은 “십계명이 무슨 글자로 기록되었을까?”였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친히 글자로 새기셨다

가기 전 어떤 구약 학자에게 “십계명이 어떤 글자로 기록되었는가?” 라는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놀랍게도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글자가 생긴 후 글자로 편집되었다는 것이다. 아니 이럴 수가! 그렇다면 성경이 거짓이라는 말인가? 말도 안 된다! 아직 히브리어 글자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두 돌 판에 하나님이 십계명을 글자로 새겼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 나는 당시 사용되던 글자가 있을 것이라 틀림없이 믿었다. 현장에 가보니 그곳에는 상형 문자 같은 음각된 그림들이 많이 그려져 있었지만 글자 같은 것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상형 문자를 사용하시어 십계명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모세가 장인 이드로의 집에서 양을 치며 살았다는 동네 ‘알 바드’를 가서야 그 의문이 풀렸다. 그곳에 있는 박물관과 리야드의 박물관을 방문한 후 글자의 출처를 알아내고 한없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모세의 40년 궁중 생활과 40년 광야 생활의 의미

모세의 일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출애굽기 3장 1절을 보면 모세의 신세를 상상할 수 있다. 나이 80에 아무런 소망도 비전도 없는 보잘것없는 야인이 되어 세끼 밥이나 얻어먹고 살고 있었다. 이런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다. 5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여러 기적을 보았다. 그런데도 모세 안에는 아무런 영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죽은 자 같았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무력해진 모세를 끊임없이 도전하였을까? 하나님이 모세를 40년의 궁중에서 최고의 학문을 닦게 하고, 아라비아 광야에서 40년간 광야의 생활을 터득하게 하셨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80년을 기다리신 하나님, 이제 때가 된 것이다. 모세가 아니면 이 광야의 여정은 불가능했다. 그 당시 모세만이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십계명을 받아 모든 율법을 받고 이해하고 가르칠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모세가 히브리어 말을 알파벳을 사용?

아라비아는 이미 주전 15세기 <타무딕>이라는 알파벳을 사용하였다. 모세는 어떤 언어든 쓰고 읽고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모세가 히브리어 말을 타무딕 알파벳을 사용하여 기록하였다고 추측한다. 마치 신라 시대 설총이 만들었다는 이두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십계명과 율법은 구전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의 단어도 틀릴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감격과 만족감과 안도감이 나를 벅차게 하였다.

광야의 삶이 본보기이며 영적 삶이다

십계명의 글자를 찾으러 갔는데 광야 생활에 대한 나의 영적 눈이 열리게 되었다. 광야의 삶이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간의 광야 생활과 주님의 광야에서의 40일 금식의 의미를 더듬어 보았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이 말한 “광야의 본보기와 거울의 영적 삶”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고전 10:11)

오랫동안 잠자던 광야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40년이라는 긴 고통의 기간을 주었는가? 왜 20세 이상의 사람들을 모두 광야에서 죽게 하셨는가? 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였는가?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광야 생활이 필요한가? 마침내 나는 그 대답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누구도 가나안 복지인 천국에 이를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적 죄성인 원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나도 그곳에 있었다면 불평하는 고라의 자손들과 함께 비참하게 땅속에 묻혔을 것이다. 20세 아래에 태어난 자들만 가나안에 입성하는 것은 바로 ‘은혜’이다.

1. 전투적 삶을 통한 광야의 영성

고전 10장은 광야의 영성에 관해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바울은 신앙생활의 거울로 “광야의 전투적 삶”을 소개하고 있는데 홍해 바다가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건넌 것을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매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말한다. 홍해 바다를 건넌 자들이 세례를 받은 자들이라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가?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 형용할 수 없었던 놀라운 감격을 느끼고 있는가? 세례가 무엇인가? 진정한 세례는 거듭남이다. 바로 새사람이 된 것이다.

2. 신령한 음료를 마시다

바위가 갈라져 생수가 터져 나왔다. 이것은 신령한 반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성찬식은 예수의 피와 살을 먹는 것이다. 예수를 먹는 자는 영원히 사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연상하면 그 의미를 알게 된다. 배에서 생수가 나는 성령충만을 의미한다. 물은 생명이다. 우리는 날마다 이 물을 마시고 사는가? 하루도 거를 수가 없다. 물이 없으면 우리는 죽는다. 생수가 되시는 주님과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성령이 소멸되지 않았는지 늘 점검해야 한다.

3. 매일 먹는 만나

우리의 만나는 두 가지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육체에 필요한 양식과 영혼에 필요한 영적 양식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이상의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풍성한 양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양식을 이해하고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영적 양식인 만나의 말씀을 먹으며 늘 은혜와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만나가 없었다면 살아남을 자는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만나는 무엇인가?

4. 병들지 않고, 옷이 낡지 않고, 신발이 닳지 않고 해와 달이 상치 않았다

이런 기적이 없었다면 광야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사우디의 광야를 본 나는 광 영성의 실체를 깊이 알게 되었다. 풀 한 포기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속건제를 드릴 수 있었을까? 아프리카 사하라의 무슬림들은 1년에 한 번 드리는 제사를 위해 양과 염소를 키운다. 풀이 없음므로 이웃 나라에서 빈 상자를 수입해서 그것을 먹이로 주어서 키운다. 사우디 광야에는 말라 비틀어진 조각목 밖에 없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기적이 없었다면 40년의 기나긴 기간에 결코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을 하셨고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다. 그리고 바울은 이 힘든 광야의 생활을 ‘거울’로 삼으라고 했다.

광야에서 배우는 영성은 축복이다

인류의 역사는 “잘 살면 망한다.”는 것을 외치고 있다. 지구상의 위대했던 많은 나라가 한 때는 흥했지만 결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잘 사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이 축복에 잠식되지 않고 더 잘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다. 광야의 영성은 엄청난 축복이다. 이스라엘은 <키부츠 노동 공동체>를 통해 참된 영성을 보여주었다. 그 키부츠에서 많은 훌륭한 인물들이 나와 나라를 위해 일했다. 제9대 대통령 시몬 페레스도 대학을 나오지 않은 키부츠의 농사꾼이었다. 이스라엘 승리의 역사는 ‘광야의 영성’이었다.

세례 요한은 광야를 집으로 삼고 살았다. 많은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은 광야의 수도자들이었다. 광야의 식탁은 영적 음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금식으로 40일을 보낸 주님은 드디어 공생애로 들어갈 수 있었다. 광야의 영성은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다. 자신을 살리고 가족을 살린다. 광야의 영성은 세상을 살린다.

킹 살렘 농장에서 광야의 영성을 깨닫는다.

킹 살렘 농장은 이런 ‘광야의 영성’을 깨닫게 하는 선교사 영성 훈련소이다. 함께 일하는 노동 공동체이며, 말씀 공동체이고, 기도 공동체이다. 이스라엘의 키부츠를 뛰어넘는 훈련 학교이다. “일하지 않고는 먹지도 말라.”는 말씀의 실천의 장이다. 광야를 거치지 않고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 광야의 영성은 사우디 광야에서 일어난 모든 기적을 맛보는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의 여정이 없었다면 인간의 구원의 길도 막혔을 것이다. 광야의 영성이 바로 사는 길이다. 승리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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